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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kuk: Quintessence 에 실린 김인혜 큐레이터의 글
1. 화가의 길
한 때는 강원도였으나 지금은 경상북도로 편입된 울진(蔚珍). 몇 발자국만 안으로 들어가면 금세 한 길의 깊이가 되어 버리는 검푸른 동해바다가 있고, 조금만 내지로 들어가면 이내 해발 1,000미터의 높은 산을 맞닥뜨리게 되는 곳이다. 태백산맥의 준령들 사이사이로 급격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는 폭포를 이루다가 갑자기 해변을 만나 개천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깊은 바다, 높은 산, 평온한 개천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바로 그 곳 언저리에 유영국의 생가가 있다. 세계에 이러한 지형이 또 있을까 싶은, 그렇게 깊고도 깊은 자연 한가운데에서 그가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임진왜란도 일어나기 전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도 더 전에 지어진 자그마한 한옥이다. 울진에서 발행된 여러 책과 잡지에는, 유영국의 오래된 집안 이야기가 전설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의 집안은 조부셨던 유재업(劉載業, 1845~1913)의 세대에 울진의 ‘말루’ 지역에 정착하며 막대한 부를 이루었는데, 이는 유재업의 타고난 사업 수완에 힘입었을 뿐 아니라 시싯골이라는 깊은 골짜기 풍수지리상의 최고 길지(吉地)에 고조부의 묘소를 이장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재업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가서 노루를 쫓아 산길을 따라 오르던 중 주위가 온통 눈으로 뒤덮인 산속 한가운데에서 기적같이 눈이 쌓이지 않는 따뜻하고 평평한 땅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루도 이 땅에서 잠시 놀다가 홀연히 사라졌는데, 다시 지세를 찬찬히 보니 주변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호위하는 듯한 기막힌 길지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조부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해 왔고, 이후 집안의 부가 일어났다는 설화 같은 이야기이다.
유재업이 쌓은 부는 유영국의 아버지인 유문종(劉文鐘, 1876-1946)에 이르러 좋은 일에 쓰이곤 했다.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신돌석 부대가 불영계곡 깊은 곳에 위치한 불영사(佛影寺)를 근거지로 의병 활동을 할 때에 지역 유지였던 그는 거금을 흔쾌히 내놓았다. 일제 강점기 울진 지역의 민족 사학이라 할 수 있는 제동초등학교가 삼일운동 이후 정식 인가를 받고 1925년 개교할 때에는 일천원의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제동초등학교는 제때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다양한 연령층의 지역민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고, 고려혁명당 사건, 광주학생운동, 조선 독립공작당 사건 등 일제 강점기 수많은 사건에 휩싸이며 탄압을 받다가 1943년 울진공립보통학교에 강제 통합된 역사를 지닌 곳이다.1)
교육열이 남달랐던 유영국의 부친은 셋째 아들인 유영국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자녀들을 서울로, 도쿄로 유학하도록 지원했다. 유영국은 1931년 경성 공립 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하던 중 4년만 수료한 후 돌연 자퇴하고, 1935년 4월 도쿄 문화학원(文化學院)에 입학했다. 일제강점기 엄격한 교육 환경 속에서, 학급반장이었던 그는 일본인 교사의 학생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여 자퇴한 것으로 전한다. 이후 그가 선택한 문화학원은 1921년 일본에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한창이던 때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사립학교의 하나로, 한때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던 니시무라 이사쿠(西村伊作, 1884-1963, 건축가이자 교육사업가)가 설립한 문예(文藝) 전문 학교였다. 원래 중학교로 시작했으나 1925년부터 대학부를 설립하여, 대학부 본과 외에 미술부, 문학부, 음악부, 여학부 등의 학과를 개설하고 있었다. 군국주의 시대 최후의 보루와 같이 자유로운 학원분위기를 견지하다가 1943년 니시무라 이사쿠가 감옥에 끌려가면서 강제 폐교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도판 1 참조).
유영국은 이곳 문화학원의 입학 시기를 전후하여, 그의 예술가로서의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세 명의 일본인 화가를 만나게 된다. 바로 사토 쿠니오(佐藤九二男, 1897~1945),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 1905~1999), 그리고 하세가와 사부로(長谷川三郞, 1906~1957)이다. 먼저 사토 쿠니오는 유영국의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미술 교사로,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1899~1991)의 후임으로 1927년 이 학교에 부임하였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일본의 재야미술계와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독립미술가협회전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던 인물이다. 그는 야마시타 신타로가 나중에 프랑스 유학 후 돌아와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작품을 그릴 때조차 오로지 야수파적인 색채를 유지하며 우수에 찬 조선인의 모습을 화폭에 담곤 했다. 유영국은 경성제2고보 시절 미술반 활동도 한 적이 없었다고 했지만, 사토 쿠니오의 자유로운 미술 교육에 감화를 받았음은 확실해 보인다. 사토 쿠니오는 유영국이 경성제2고보를 4년만 마치고 문화학원에 입학할 수 있게 되기까지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35년 4월 유영국이 도쿄에 정착한 직후, 사토 쿠니오가 유영국에게 보낸 엽서(도판 2)를 통해 볼 때 두 사제 간의 긴밀했던 관계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문화학원 시기 유영국이 만났던 중요한 일본인 화가는 무라이 마사나리였다. 무라이는 문화학원 설립자인 니시무라 이사쿠와 동향(同鄕, 와카야마현 和歌山県)으로 일찍부터 이들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1925년 문화학원이 대학부를 설립한 것은 동경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무라이 마사나리를 문화학원에 진학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얘기될 정도이다.2) 어찌되었든 무라이 마사나리는 문화학원 대학부 제 1회 입학생이 되었고, 3년제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랑스 유학을 감행했으며,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문화학원의 강사로 부임하였다. 무라이 마사나리는 동경미술학교의 아카데미즘적인 교육 방식을 탈피하여, 세계 미술의 ‘전위(前衛)’에 서는 방편으로 ‘추상화’의 노선을 의도적으로 채택한 화가이다. 그는 1934년 신시대양화전이라는 소그룹의 결성을 거쳐, 1937년 자유미술가협회 창립의 주도적 인물이 되었다. 1937년 당시 문화학원 3학년에 불과했던 유영국은 무라이 마사나리 추종자들의 모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N.B.G.(Neo Beaux-Arts Group)의 정식 멤버가 되었고(이 단체는 문화학원 미술부 9회~11회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다3)), 곧바로 자유미술가협회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38년 문화학원을 졸업한 해에는 자유미술가협회상을 수상하며 회원 자격을 얻기까지 했다. 유영국의 이러한 일본미술계 ‘등단’에는 무라이 마사나리의 지원이 있었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라이 마사나리는 태평양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조차 끝까지 전쟁화를 그리지 않았으며, 스스로 창립했던 자유미술가협회를 자진 탈퇴하여 1950년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하였다. 그 후 1999년 타계할 때까지 추상화의 개척자로 쉼 없는 작품 활동을 계속 했다(도판 3 참조).
마지막으로 하세가와 사부로는 유영국이 스스로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 꼽았을 정도로, 그의 진로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하세가와는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미학과 출신의 엘리트이며, 탁월한 미술평론가이자 예술가였다. 유럽 여행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재력을 가졌던 그는 유럽의 최신 미술 동향을 『미즈에(みづゑ)』, 『비노쿠니(美の國)』 등에 끊임없이 소개하며, 당대 미술계 최고의 지식인으로 활약했다. 무라이 마사나리와 함께 자유미술가협회의 초창기 리더였던 그는 조선인 예술가들에게 특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1938년 유영국이 협회상을 받을 때에도 그의 작품에 대한 호평을 『비노쿠니』에 실었으며4), 김환기, 문학수, 이중섭 등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평론을 많이 남겼다. 유영국은 사진을 공부했던 그의 친구 주현(본명 이범승)과 함께 하세가와 사부로의 집에 드나들었던 것 같다. 그는 1937년 『アブストラクトアート(Abstract Art)』라는 책을 발표하며 추상미술의 최고 이론가로 활약하다가, 군국주의 시대 전위예술을 탄압하는 분위기 속에서 1941년에 유치장에 끌려간 적이 있다. 1942년 이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자유미술가협회의 개칭) 전시에도 더이상 출품하지 않았으며, 1944년에는 시가 현 나가하마(長浜)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5) 하세가와 사부로의 강한 리더십, 타협하지 않는 생활 태도, ‘추상’ 미술에의 경도, 사진에 대한 관심 등은 유영국과 여러 지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예술’을 통해 일종의 유토피아적 ‘삶’을 ‘실천’하고자 했던 하세가와 사부로의 철저한 신념은 유영국의 생애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도판 4 참조).
2. 추상 화가의 길
화가가 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가게 된 유영국은 이후 놀라울 정도의 비약적인 속도로 곧바로 추상미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가 문화학원 재학 시절과 졸업 직후 제작한 작품들은 처음부터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만 이루어진 엄밀한 추상작품이었다. 두께가 다른 사각형의 나무판을 반듯하게 잘라 붙이고 흰색을 칠해 마무리한 그의 초기 작품(도판4, <작품404-D>)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고, 색채도 없고, 양식도 없다. 다만, 그것이 벽에 걸렸을 때 조명을 통해 더욱 뚜렷해지는 정교한 선들, 그 선들의 위치와 굵기,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에 의해 칠해진 선과 그림자로 인해 생겨난 선들 사이의 정밀한 상호 관계만이 부각될 뿐이다.
‘추상’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하나의(‘양식’이라기 보다) ‘이념’으로 대두되었다. 1917년 몬드리안이 처음 신조형주의(Neo-Plasticism) 이론을 발표하고, 추상-실제(Abstract-Real) 회화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추상’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술이 걸어가야 할 당연한 경로라고 주장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통렬한 경험을 거친 예술가들은, 인류가 지금까지 헛되이 ‘비극’으로 얼룩진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극적 혹은 비극적 요소도 제거된 ‘순수하고 완전한 평형 상태’를 예술과 삶 속에서 함께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파토스적인 격정으로부터도 거리를 두어야 하며, 극도로 고양된 정신성을 통해, “조화로움의 순수한 표현”을 찾아야만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서‘추상’예술은 새로운 조형을 통해 자연의 정확한 질서를 드러내고 완벽하게 동등한 평형상태를 시각화하는 일이고, 이 일은 인류의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창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러한 몬드리안식의 초기 추상미술 이념은 일제강점기 혼돈의 시대를 경험한 유영국에게는 누구보다 매력적인 개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왜 화가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늘 짧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어서.”그리고 또 “왜 추상미술을 택했는가?”하는 진부한 질문에 대해서도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말이 없어서.”
여기서 “말”은 그에게서 ‘혼돈’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말”은 일종의 ‘극적인(dramatic)’요소를 낳고, 이것이 바로 완전하게 순수한 세계에의 도달을 방해한다. 작가는 평생 스스로 ‘순수한 조형의 세계’를 시각화하는 일에 매달림으로써, 인간의 삶과 정신을 고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자부심에서 살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결코 이러한 이상을 좇기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유영국은 급히 도쿄 생활을 마치고 고향 울진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이 이러한 첩첩산중에 이젤을 들고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 유학 출신의 지식인들 뒤에는 항상 특고경찰(특별고등경찰, 지식인들의 사상 감시 등을 하는 일본인 경찰)이 따라붙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아예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그는 1943년부터 1945년 해방, 1950~53년 한국전쟁 시기를 거쳐, 1955년 그래도 화가가 되기를 다시 결심하고 상경하기까지 약 10년의 세월 동안 어부로, 피란민으로, 그리고 양조장의 주인으로 살아야 했다.
1955년, “금산(금으로 된 산)도 싫고, 금밭(금으로 된 밭)도 싫다. 나는 화가가 되겠다”라고 스스로 선언한 뒤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 정착, 전업화가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든 분야가 다시 일어나는 시점, 그는 처음에 매우 적극적으로 미술계의 ‘재건’에 노력을 기울였다. 1956년 모던아트협회, 1957년 현대작가초대전, 1962년 신상회 등의 단체 결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그는 국가 주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운영의 대척점에 서서 전위적인 미술그룹을 활성화하는 일에 헌신했다. 이 시기 그는 분명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신념을 견지하고 있었다. 즉, 파토스의 세계를 부정하는 ‘추상’언어의 가치가 새로운 국가인 한국의 삶과 예술에 침투되기를 갈망했다(도판5).
3. 길이 다다른 곳: 유영국의 예술적 성취
그가 미술-사회 활동에 몰두한 것은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약 10년간의 시기이다. 그러나 1964년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2002년 86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약 40년의 시기 동안 그는 일체의 단체 활동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세상과 거의 단절시킨 채 작품 제작에만 몰두했다. 오직 2년에 한 번씩 추운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할 수 없는 겨울이 오면, 아무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개인전을 꾸준히 정기적으로 열었을 뿐이다(정기적인 개인전에서 그의 작품이 팔린 사건은, 1976년 그의 나의 60세 때 처음 일어났다).
그는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1955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약 20년간 매우 체계적으로 작품 제작의 ‘단계’를 밟아갔다. 그 ‘단계’는 아마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진전’의 과정이었을 텐데, 큰 흐름에서 본다면, 일종의 더욱‘순수한 추상’에로 이르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1950년대 중반 작품은 인물, 풍경, 정물 등 여러 장르를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각각의 대상을 선, 면, 색채라는 기본적인 조형 언어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이후 1960년경에 이르러 그는 작정한 듯이 ‘풍경’, 특히 ‘산’의 풍경에만 몰두한다. <산>(1960, 도판6)에서 보듯이, 그는 거의 검정색에 가까운, 산의 무섭도록 숭고한 깊이감을 회화로 표현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산이라는 ‘자연물’을 그린다기보다, 장엄한 산의 ‘기운’을 어떻게 회화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는, 어찌 보면, 동양의 회화가 수천 년 동안 고민했던 질문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소재라는 측면에서라면, 그는 더이상 다른 것을 선택할 필요도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대신 그는‘산’으로 상징되는,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힘’ 혹은 ‘에너지’를 표현하는 ‘회화 언어’의 발전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형태’와‘색채’에 대한 탐구를 의미했다.
형태적 측면에서 보면, 그는 상당히 유기적인 것에서부터 점차 완전하게 기하학적인 것으로 나아갔다. 색채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탐구는 더욱 집요했는데, 처음에 그는 다른 화가들이라면 선뜻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은, 지극히 순수한 원색을 하나의 화면에 병치하는 방식을 탐구했다(도판7). 이 강렬한 원색들은 서로 기묘한 조화와 긴장을 형성하면서, 화면에 생동감과 심지어 신비감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동일한 계열의 색채가 미묘한 차이를 형성하며 하나의 화면에 층위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연구했다(도판8). 또한 형태 실험과 색채 실험이 각각 개별적으로 ‘완전한 순수’를 향해 나아갔을 때, 그의 <작품(도판9)>과 같은 ‘결정적인’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그는 이와 같은 자신의 작업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창작 과정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에 나는 항상 뚫고 나갈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작품을 다음 작품을 위한 과정이고, 계속적으로 작품을 해야 되는 근거가 된다.”그는 홀로 자신의 조그만 화실에 앉아 스스로 설정한 한 단계 한 단계의 과정을 천천히 꾸준히 밟아가며, 자신을 세우고 다시 부정하는, 고독하고 고단한 결투를 생애 내내 계속했던 것이다.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서 결정적 변화의 시기는 1974년경 다시 찾아왔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심각한 병마가 덮친 후, 급기야 1977년 심장박동기를 달았고, 이후 타계할 때까지 그는 8번의 뇌출혈, 37번의 병원 입원 생활을 겪어야 했다. 그의 작품에서 강렬도가 떨어지고 밀도가 옅어지며, 대신 서정(抒情)이 등장하고 평온한 위로가 생겨나는데에는 이러한 그의 신체적인 변화가 일차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끈질긴 병고(病苦)와 마찬가지로 끈질긴 작업 활동을 약 30년간 지속한 후, 1999년 그는 생애 마지막 작품을 남겼다(도판10). 붉은 계열의 삼각형 형태들이 점차적으로 고양되는 구도를 형성하며 위를 향해 솟아 올라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룬 화면의 상부 정상에는 마치 피안의 세계를 향해 열려진 ‘틈’과 같은 좁다란 선이 드러나 있다. 작가는 과연 이와 같은 완벽한 조형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경험했을까? ‘말’도 ‘비극’도 없는 순수한 세계에 다다르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자연의 숭엄한 아름다움을 인간이 온전히 그려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불필요한 요소들이 제거된 절대적으로 순수한 ‘조형’을 구현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한 번 생애를 걸고 도전해볼 만한 일이기도 하다. 유영국의 마지막 작품에서 우리가 거의 ‘종교적’이라고 할만한 차원의 세계를 언뜻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순수의 찰나를 그 작품을 통해 암시 받기 때문일 것이다.
1) 울진초등학교 편, 『울진초등백년사』, 2012, p. 19.
2) 무라이 마사나리 미망인과의 인터뷰 중에서 (2016년 2월 1일, 무라이 마사나리 기념관에서)
3) N.B.G. 회원으로 문화학원 9회 졸업생은 오카모토 데츠시로(岡本鉄四郎), 10회 졸업생은 가메야마 토시코(亀山敏子), 츠시모토 사사무(津志本貞), 나가미 요타카(永見胖), 11회 졸업생은 유영국이 있다.
4) 長谷川三郎, 「第二回自由美術展入選作品評」,『美之國』, 14-7, 1938, p. 24
도판1. 유영국의 문화학원 졸업사진
도판2. 무라이 마사나리, <도시>, 1940년경
도판3. 하세가와 사부로, 형태, 1937
도판4. 유영국, <작품404-D>, 1940, 2002년 재제작
도판5. 유영국, <4월>, 사상계, 1960년 6월호
1960년4.19 혁명 기념호에 수록된 유영국의 삽화. 유영국은 4.19 혁명을 통해 독재 정부가 무너졌을 때 그 어느 때보다 기뻐했다고, 작가의 부인 김기순여사가 술회 한 바 있다.
도판6. 유영국, <작품>, 1960년, 삼성미술관리움소장
도판7. 유영국, <작품>, 1964년, 삼성미술관리움소장
도판8. 유영국, <작품>, 1967년, 개인소장
도판9. 유영국, <작품>, 1968년, 국립현대미술관소장
도판10. 유영국, <작품>, 1999년, 개인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