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한복판에서 보는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2025.10.27.I조선일보
주프랑스 한국문화원 '한국의 색' 특별전
박서보·김창열·김기린 등의 유명작 47점 전시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이 파리 한복판에서 한국 현대미술 60여년의 흐름을 ‘색’이라는 주제로 꿰뚫어보는 ‘한국의 색(Couleurs de Corée)’ 전시를 24일 개막했다. 내년 한·불 수교 140주년을 앞두고 마련한 특별전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34명의 작품 47점을 통해 ‘색’을 단순한 시각 요소가 아닌, 시간과 물질, 빛의 언어로 읽어내는 것이 이번 전시의 내용이다. 연대 범위는 1968년부터 2025년까지로, 한국 현대미술의 긴 궤적을 한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다. 회화를 중심으로 섬유와 한지를 사용한 작품, 사진과 비디오, 도자기와 수묵화 등이 균형 있게 배치됐다. 단색화 속 ‘한색(寒色)의 절제’부터 ‘도시와 디지털의 빛’까지,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시대·재료·감각의 층위로 보여준다.

한국 문화원 건물 2층과 3층 공간이 모두 이번 전시를 위해 할애됐다. 2층은 색의 근원과 질서를 탐색하는 공간이다. 김기린의 ‘무제(Sans titre·1968)’와 김창열의 ‘구성(Composition·1969)’은 한국 추상과 단색화 계열이 구축한 절제된 색의 문법을 상징한다. 화면 전체에 번지는 미묘한 색면, 물감과 그 지지체(支持體)가 만들어내는 물질감은 색이 곧 사유라는 한국적 감각을 드러낸다. 1990년대 작업과 2000년대 이후의 작품이 함께 놓이며, 과거의 색과 현재의 색이 대화하도록 동선을 설계했다.

3층은 색의 재료·과정·감각을 넓히는 장이다. 유영국의 ‘작품 005(Work 005·1994)’는 음각 판화로, 색면과 형태의 응축을 통해 산·자연의 리듬을 드러냈다. 채성필의 ‘대지의 꿈(rêve de terre 250917·2025)’은 흙을 캔버스에 입혀 흙빛의 깊이를 끌어올리고, 배헤윰의 ‘비트코인너즈 앤썸(Bitcoiners’ Anthem·2025)’은 유화의 밀도와 현대적 주제의 대비로 눈길을 끈다. 제시 천의 ‘시:sea(2022)’는 언어·풍경을 통해 색의 서정성을 탐구한다.

프랑스인 관람객들은 박서보의 ‘묘법(Ecriture)’ 연작에 큰 관심을 보였다. 여러 겹의 한지를 덧붙이고 물감을 입힌 뒤, 막대나 대자를 이용해 일정한 간격으로 밀어내 입체적인 선의 패턴을 만들어 냈다. “유럽의 미니멀리즘과 구조주의적 회화와 유사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의 ‘절제미’가 보인다”, “반복을 통한 시간과 색의 축적, 불교적 수행의 정신이 느껴진다”, “피에르 술라주나 이브 클랑의 작품을 떠오르게 하는 강렬한 작품”이라는 감상들이 나왔다.

전시는 가장 오래된 작업과 가장 최근의 작업을 한 층에서 병치하거나, 서로 다른 매체를 나란히 놓아 색이 매체와 시대를 횡단하는 방식을 보여줬다. 예컨대 1960~70년대의 절제된 색면 회화와 1990년대 판화, 2020년대 영상·회화가 이어지며, ‘한국의 색’이 고정된 팔레트가 아니라 움직이는 개념임을 강조한다.

한국문화원 측은 “이번 전시는 ‘색’을 통해 한국 미술이 시간의 깊이와 재료의 저항, 빛의 확장을 어떻게 품어왔는지를 보여주려 했다”며 “30여 작가와 40여 작품의 호흡으로 절제와 실험이 공존하는 색의 서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 전시는 미국 주간지 뉴욕 옵저버가 선정한 ‘올해 아트 바젤 파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12개 전시’ 중 하나로도 꼽혔다. 파리 8구의 한국문화원에서 내년 8월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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